재난이 닥쳤을 때 사람이 가장 먼저 지키려는 게 뭘까요?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그 답이 '가족'이 아니라 '주소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 해봤습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서울에서 홀로 살아남은 황궁 아파트 103동을 배경으로, 그 안에 남은 사람들이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지를 냉정하게 담아냅니다.
현수막과 아파트, 현실이 먼저였습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소름이 돋았던 이유는 영화관을 나서면서 "저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라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제가 살던 동네에 공공임대주택이 들어선다는 소식이 퍼졌습니다. 공공임대주택이란 저소득층이나 무주택 서민에게 시세보다 저렴하게 공급하는 정부 지원 주거 형태입니다. 그런데 평소 인자하게 인사를 나누던 이웃 어른들이 하루아침에 결사반대 현수막을 들고 나섰습니다. "학군이 나빠진다", "집값이 떨어진다"는 말이 입에서 입으로 돌았고, 저는 그게 정말 이해가 안 됐습니다.
그 장면이 영화 속 황궁 아파트 주민들이 외부인을 '바퀴벌레'라 부르며 몰아내는 장면과 겹쳐 보였습니다. 영화에서 주민들이 외부인 색출에 나서는 장면은 분명 극적인 과장처럼 보이지만, 현실의 현수막을 직접 목격한 저로서는 그 과장의 폭이 생각보다 좁다고 느꼈습니다.
이 지점에서 영화가 다루는 핵심 개념이 등장합니다. 바로 내집단 편향(in-group bias)입니다. 내집단 편향이란 자신이 속한 집단의 구성원에게는 호의를 베풀고, 외부 집단에는 적대적이거나 배타적으로 반응하는 심리적 경향을 말합니다. 사회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이 경향은 자원이 희소해지거나 위협을 느낄 때 급격히 강화됩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영화의 황궁 아파트는 바로 그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한 공간이었고, 우리 동네 현수막도 그 다르지 않았습니다.

영탁은 악당인가, 우리의 거울인가
영탁(이병헌)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볼 것이냐를 두고 생각하는 분들마다 의견이 많이 갈리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를 악당으로 읽기 어려웠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잔인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혼란 속에서 주민들을 보호하며 지도자로 떠올랐고, 집단의 불안을 자신의 권위로 흡수하는 과정에서 점차 폭력성을 내재화했습니다.
이 과정을 사회심리학에서는 권위주의적 리더십의 강화 메커니즘으로 설명합니다. 쉽게 말해, 두려움을 먹고 자라는 지도자는 구성원이 스스로 만들어낸다는 뜻입니다. 영화 속 주민들이 영탁에게 열광하는 장면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실제로 2023년 한국 사회갈등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2%가 "위기 상황에서는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라고 답했습니다(출처: 한국행정연구원). 불안이 커질수록 사람은 명확한 선을 그어주는 리더에게 기댑니다.
영탁이 지팡이를 짚고, 빨간 페인트로 주민과 비주민을 나누는 장면에는 성경의 모세 서사가 겹쳐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를 가짜 목자로 묘사합니다. 여기서 가짜 목자란, 공동체를 진정한 가치가 아닌 집단의 공포와 배타성을 기반으로 이끄는 인물을 뜻합니다. 흰 돌과 검은 돌이라는 상징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흰 돌은 주민 자격을 나타내지만, 마지막 투표 장면에서 영탁이 검은 돌을 줍는 장면은 그 자신이 처음부터 내부인이 아니었음을 암시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꽤 오래 멈칫했습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이 인물을 통해 묻는 것은 명확합니다. 당신이라면 영탁에게 흰 돌을 던지지 않겠냐고요.
명화의 정의감, 현실적인가 비현실적인가
명화(박보영)를 두고 의견이 나뉘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녀의 도덕적 일관성에 깊이 공감하고, 어떤 분들은 "극한 생존 상황에서 저 정도 선의는 배부른 소리"라고 반응합니다. 저는 솔직히 후자에 더 가까운 반응을 보였습니다.
영화 비평에서 명화 같은 인물을 도덕적 앵커(moral anchor)라고 부릅니다. 도덕적 앵커란, 집단이 가치 판단의 기준점을 잃었을 때 관객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서사적 장치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건, 명화의 존재가 오히려 몰입을 방해하는 지점이 있다는 겁니다. 명화가 너무 일관되게 선하기 때문에, 그녀가 겪는 갈등이 진짜 갈등처럼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저를 더 불편하게 후벼판 인물은 민성(박서준)이었습니다. 그는 시스템에 순응하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존심도 도덕도 조금씩 내려놓습니다. 40대 가장으로 치열한 삶을 살아온 분들이 이 인물에게 공감한다는 반응을 여럿 봤는데, 그 이유가 이해됩니다. 선과 악보다 생존이 먼저인 상황에서, 민성의 선택은 비겁하지만 낯설지 않습니다.
이 영화를 제대로 소화하려면 아래 세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 나는 황궁 아파트에 있었다면 외부인을 내쫓는 쪽에 표를 던졌을까?
- 이웃이 외부인을 숨기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눈감을 수 있었을까?
- 명화처럼 아파트 밖을 선택할 용기가 나에게 있었을까?
이 세 질문에 자신 있게 "아니요"라고 답할 수 있는 분이 얼마나 될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불편한 이유는 불쾌한 장면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마지막에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었어요"라는 대사 한 줄이 관객을 향한 돌직구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분이라면, 단순한 재난 영화로 기대하지 마시길 권합니다. 보고 나서 스스로가 좀 불편해지는 경험을 하고 싶다면, 그때 보시는 게 맞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AP-Yg93hqd8
https://namu.wiki/w/%EC% BD%98% ED%81% AC% EB% A6% AC% ED% 8A% B8%20% EC% 9C% A0% ED%86% A0% ED%94% BC% EC%95%84/%EC% A4%84% EA% B1% B0% EB% A6%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