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밤에 거실 불을 다 끄고 넷플릭스로 틀었다가, 전반부에는 숨을 못 쉬고 후반부에는 피자를 내려놓게 만든 영화입니다. 한소희와 전종서가 강남 유흥가를 배경으로 금괴 80억을 노리는 이환 감독의 상업영화 데뷔작 프로젝트 Y, 직접 보고 나서 느낀 것들을 솔직하게 풀어봤습니다.
이환 감독이 선택한 첫 상업영화, 뭘 담으려 했나
솔직히 이 영화는 예상 밖이었습니다. 이환 감독하면 저는 박화영을 먼저 떠올리거든요. 독립영화 특유의 날것 그대로의 질감, 10대 여성들의 생태계를 거의 다큐멘터리처럼 포착했던 그 연출력이 강렬하게 남아 있어서, 상업 헤이스트 무비로 방향을 튼다고 했을 때 기대 반 걱정 반이었습니다.
헤이스트 무비(heist movie)란 도둑이나 사기꾼이 대담한 절도 작전을 펼치는 범죄 장르를 말합니다. 오션스 일레븐이나 이탈리아 잡처럼 치밀한 계획과 반전을 특기로 하는데, 프로젝트 Y는 그 공식을 여성 투톱 버디물 구조에 얹은 형태입니다.
영화는 강남 유흥가에서 화류계 에이스로 일하던 미선(한소희)과 도경(전종서)이 4년 치 전 재산을 전세 사기로 날리면서 시작됩니다. 사회적 약자가 시스템에 배신당하는 설정은 요즘 관객들이 가장 강하게 공감하는 서사 구조 중 하나인데, 제가 보기에도 도입부 20분만큼은 이환 감독이 왜 상업영화에서도 통할 수 있는 감독인지 납득이 될 만큼 설득력 있게 전개됩니다. 런던 아시아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것도 이 전반부의 밀도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출처: 런던 아시아 국제 영화제).

전반부, 눈과 귀가 동시에 압도당했던 순간들
직접 겪어보니, 이 영화의 강점은 비주얼 언어와 사운드가 하나로 맞물리는 방식에 있습니다. 음악감독 그레이(GRAY)가 설계한 비트가 화면 위에 얹히는 순간, 강남의 네온사인과 두 배우의 실루엣이 그야말로 뮤직비디오와 영화의 경계를 날려버립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화면 안에 담긴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조명, 인물 배치, 색채, 소품까지를 연출자가 의도적으로 설계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이환 감독은 이 미장센 측면에서 상업영화 데뷔작치고는 압도적인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한소희 배우가 가죽 재킷을 입고 금괴를 발견하는 장면, 전종서 배우가 나른한 목소리로 대사를 치며 독기 서린 눈빛을 흘기는 장면은 제가 침대에 누워 보다가 자세를 고쳐 앉게 만든 씬들이었습니다.
조연진도 놀라웠습니다. 김신록 배우가 얼음을 와작와작 씹어 삼키며 정영주 배우를 노려보는 대면 씬은 애드리브로 알려져 있는데, 그 짧은 장면에서 소름이 쫙 돋았습니다. 약에 취한 줄만 알았던 인물이 눈을 번쩍 뜨는 씬, 점집 무당 캐릭터가 등장하는 장면도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전반부의 경험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그레이(GRAY) 음악과 강남 네온 비주얼의 조합이 즉각적인 몰입감을 만들어 냄
- 한소희·전종서의 캐릭터 자체가 뿜어내는 퇴폐적 분위기가 설명 없이도 설득력을 가짐
- 김신록, 정영주 등 조연 배우들의 짧은 씬이 오히려 주연보다 강하게 기억에 남음
- 도입부 김완선 목소리가 깔리는 순간부터 공간감이 확 살아남
중반 이후, 스타일리시한 껍데기 안이 비기 시작한다
그런데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강하게 느낀 건 중반부 이후의 공허함이었습니다. 금괴를 손에 넣은 순간부터 영화는 방향을 잃기 시작하는데, 정확히는 캐릭터 드라이브(character drive), 즉 인물 자체의 욕망과 갈등이 서사를 끌고 가는 힘이 급격히 약해집니다. 캐릭터 드라이브란 플롯의 외적 사건이 아니라 인물 내면의 동기와 선택이 이야기를 전진시키는 서사 방식을 말합니다.
여성 버디물이라는 장르적 특성상, 두 인물 사이의 심리적 긴장감이나 균열, 혹은 그것을 봉합하는 감정의 밀도가 핵심이 되어야 하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그 관계가 표면적으로만 그려집니다. 미선에게 채워진 파란 팔찌와 빨간 팔찌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마지막 꽃집 씬에서 금괴가 어떻게 거기에 놓이게 됐는지 같은 장면들이 명확한 설명 없이 넘어가는 것도 그 공허함을 가중시킵니다.
악당인 토사장(김성철)의 퇴장도 너무 허무했습니다. 강남 조직의 보스라는 설정에 비해 캐릭터에 무게감이 실리지 못하고, 오른팔 황소(정영주) 역시 위협적인 존재감을 충분히 쌓기 전에 마무리됩니다. 이환 감독 본인이 인터뷰에서 "설명을 최소화하고 속도감을 살리는 연출을 추구했다"라고 밝혔는데, 그 의도는 이해하지만 그 속도가 인물 서사를 잠식해 버린 결과로 이어진 점은 저도 아쉽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내 영화 평론 아카이브를 기준으로 보더라도, 이 작품은 비주얼 연출과 서사 완성도 사이의 균형 문제로 평단에서 엇갈린 평가를 받았습니다(출처: 네이버 영화). 네이버 실관람객 평점 6점대, IMDb 5.2점대라는 스코어가 그 불균형을 숫자로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와 말아야 하는 이유
제 경험상 이 영화는 분명히 두 종류의 관객에게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읽힙니다. 한소희와 전종서의 퇴폐적 에너지, 두 배우가 화면을 장악하는 방식 자체를 즐기는 관객에게는 OTT 킬링타임으로 충분히 값어치가 있습니다. 실제로 이 배우들의 팬층 사이에서 "비주얼 합만으로 돈값한다"는 반응이 꾸준히 나오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반면 누아르(noir) 장르 본연의 특성, 즉 도덕적 회색지대에 놓인 인물이 자멸하거나 구원받는 긴장감 있는 서사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후반부에서 명확한 실망을 느낄 가능성이 높습니다. 누아르란 범죄와 도덕적 타락을 어둡고 음울한 시각으로 담아내는 장르로, 인물의 내면 심리와 필연적 파멸을 중심에 두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 기준으로 보면 프로젝트 Y는 누아르의 외피를 쓴 채 그 내용물은 충분히 채우지 못한 작품에 가깝습니다.
이환 감독의 전작들인 박화영과 어른들은 몰라요가 가졌던 날것의 리얼리즘이 상업영화의 틀 안에서 어떻게 희석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도 읽힙니다. 그 희석이 아쉬운 건 배우들의 역량이 분명히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킬링타임용 범죄 엔터테이닝을 원한다면 전반부만으로도 충분히 눈이 즐겁습니다. 다만 여성 누아르 서사에 대한 기대치를 높게 가지고 들어가는 분이라면, 기대치를 한 단계 낮추고 시작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두 번 볼 것 같지는 않지만, 한소희와 전종서가 다음번에 더 좋은 시나리오를 만났을 때 어떤 작품이 나올지는 진심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참고: https://namu.wiki/w/%ED%94%84% EB% A1% 9C% EC% A0% 9D% ED% 8A% B8%20 Y#s-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