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가장 믿었던 동료에게 뒤통수를 맞아본 적 있으십니까. 저는 있습니다. 그 기억이 류승완 감독의 신작 <휴민트>를 보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배경으로 한 남북한 비밀 요원들의 첩보전을 다룬 이 영화, 단순한 액션 블록버스터로 가기엔 남기는 감정의 무게가 꽤 묵직합니다.
액션씬 하나만으로도 극장 값이 아깝지 않은 이유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처음에 반신반의하면서 극장에 들어갔습니다. 류승완 감독 전작들이 시각적으로 투박하다는 평을 종종 받아왔고, 저도 그 부분에 동의하는 편이었거든요. 그런데 <휴민트>는 달랐습니다.
이번 작품은 미장센(mise-en-scène) 측면에서 전작들과 확연히 차별화됩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담기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조명·구도·색감·배우의 위치를 통해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분위기와 의미를 연출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휴민트>에서는 양현석 촬영감독이 진한 콘트라스트와 차갑고 푸른 색조로 블라디보스토크의 음산함을 스크린에 그대로 옮겨 놓았는데, 이게 액션 시퀀스와 맞물리는 순간 정말 소름이 돋습니다.
특히 잊을 수 없었던 건 상향등을 기습적으로 켜서 상대의 시야를 완전히 차단한 뒤 이어지는 연발 총격 장면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극장에서 봤는데, 스피커를 통해 쏟아지는 총 격음과 타격음이 좌석을 울릴 정도였습니다. 류승완 감독이 공들인 폴리(foley) 작업이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폴리란 영화에서 발소리, 충격음, 옷 스치는 소리 등을 후반 작업으로 별도 녹음해 현장감을 극대화하는 음향 기법입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뼈가 부러지는 소리, 주먹이 살에 박히는 소리 하나하나가 살아있어서 화면이 아니라 몸으로 액션을 체감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박정민의 맨몸 액션은 독기가 넘쳐서 보는 내내 눈을 떼기가 어려웠고, 조인성은 롱코트를 입고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칼부림 시퀀스를 보여줬습니다. 다만 조인성의 경우, 선한 톤으로 또박또박 말하는 특유의 연기 패턴이 극도로 긴장된 대립 장면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일부 씬에서는 힘이 빠지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건 제 경험상 조인성이 가진 스타성의 한계라기보다, 캐릭터 설계 단계에서 좀 더 날을 세웠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입니다.
<휴민트>에서 액션의 완성도를 만드는 핵심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콘트라스트 강조 촬영과 푸른 색감으로 완성된 첩보 누아르 비주얼
- 상향등·형광등·방탄유리 등 현실적 소품을 활용한 전술적 액션 연출
- 폴리 작업을 통한 극사실적 타격음과 총격 사운드
- 잠깐의 정적 이후 연발 총격으로 이어지는 탁월한 템포 조절
영화 음악에서도 조영욱 음악감독의 손길이 느껴지는 BGM이 극의 긴장감을 끝까지 놓지 않습니다.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이 하드보일드(hard-boiled) 분위기, 즉 감정을 절제하고 냉정하고 거친 현실을 직시하는 장르적 태도가 시종일관 유지된다는 점은 전작들과 비교해 확실히 진일보한 지점입니다.

줄거리와 배신, 그리고 회사 생활이 떠오른 이유
<휴민트>의 줄거리를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국정원 블랙 요원 조 과장(조인성)과 북한 보위성 조장 박건(박정민)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다 북한 식당 종업원 채선화(신세경)를 두고 충돌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휴민트(HUMINT)란 Human Intelligence의 약자로, 기술 장비가 아닌 사람을 직접 포섭하고 활용해 정보를 수집하는 첩보 방식을 가리킵니다. 기계가 아닌 인간의 신뢰와 배신을 통해 정보가 오가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의 제목이 단순한 장르 명칭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영화를 보면서 저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요원들이 서로 의심하고,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르는 채 조각난 정보를 끼워 맞추는 장면들이 저의 직장 생활 기억을 계속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함께 밤을 새워 프로젝트를 완성하고 "이 사람이라면 믿어도 된다"라고 생각했던 동기가, 결정적인 평가 앞에서 제 공을 가로채고 저를 궁지에 몰았던 그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제가 느낀 감정은 분노보다 오히려 허탈함이었습니다. 영화 속 요원들이 총구를 겨누면서도 눈빛으로 "너도 나와 같은 처지구나"라고 말하는 그 씁쓸한 장면이 왜 그렇게 익숙하게 느껴졌는지, 극장을 나오면서야 제대로 알았습니다.
비판적으로 보자면, 박건이 채선화를 위해 조국을 배신하는 행동 동기가 충분히 설득력 있게 쌓이지 못한다는 점은 분명한 아쉬움입니다. 비슷한 구조를 가진 <베를린>에서는 표종성이 아내에 대한 감정적 죄책감이라는 구체적인 심리적 경로가 묘사됩니다. 반면 <휴민트>는 분위기의 무게감으로 이 공백을 메우려 하는데, 모든 관객이 그 무게를 고스란히 받아들이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제가 직접 봤을 때도,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이 사람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라는 의문이 슬며시 올라왔습니다.
첩보 과정의 허술함도 마찬가지입니다. 호텔 CCTV 하나로 비밀 접선이 발각되는 장면이 반복될 때, 영화가 만들어 놓은 긴장감이 살짝 흔들립니다. 이런 서사적 밀도의 빈틈은 하이 콘셉트(high-concept), 즉 강렬한 설정과 비주얼을 전면에 내세우는 장르 영화가 자주 지불하는 비용이기도 합니다. 어느 정도는 감수하고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2024년 한국 상업 영화 시장에서 액션 장르의 점유율은 전체 흥행 상위권의 40%를 넘어섰습니다(출처: 한국영화진흥위원회). 그만큼 관객의 눈높이도 높아졌고, <휴민트>는 그 기대 안에서 액션 연출만큼은 충분히 답을 내놓은 작품입니다.
영화가 하드보일드 첩보 누아르라는 장르적 정체성을 얼마나 잘 구현했는지는, 1980~90년대 홍콩 누아르와 프렌치 누아르를 오마주한 스플릿 디옵터(split diopter) 기법에서도 드러납니다. 스플릿 디옵터란 렌즈 앞에 반쪽짜리 근거리 렌즈를 덧대어 화면의 원거리와 근거리를 동시에 선명하게 포착하는 촬영 기법으로, 클래식 누아르 영화에서 긴장과 대립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됩니다. 이 기법이 2026년 관객에게는 다소 올드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지적도 있지만, 저는 오히려 그 고집이 이 영화의 개성이라고 봅니다.
영화비평가협회(FIPRESCI)가 발표한 2024년 아시아 장르 영화 트렌드 리포트에서는 "서사보다 분위기로 관객을 이끄는 영화가 증가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습니다(출처: FIPRESCI). <휴민트>가 정확히 그 흐름 위에 있는 작품입니다.
사람 관계에 지쳐 있는 날, 믿었던 사람에게 상처받아 세상이 차갑게 느껴지는 날, <휴민트>를 보러 가시기를 권합니다. 마지막 컨테이너 부두의 액션이 어깨를 짓누르던 피로를 훌훌 털어줄 것입니다. 그리고 극장을 나오면서 "그래도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이 영화가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조금 더 선명하게 들릴 것입니다. 고집스럽게 장르를 지키면서도 인간의 얼굴을 놓지 않으려 했다는 점에서, 저는 이 영화를 충분히 극장에서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고: https://namu.wiki/w/%ED% 9C% B4% EB% AF% BC% ED% 8A% B8(% EC%98%81% ED%9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