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생일 축하해, 분유통 던져줘 — 그게 마지막 대화였다”
평범한 일상의 한마디가 나와 아빠의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날 아기 분유를 타다가 엉겁결에 던진 내 장난 섞인 외침에 아빠는 허허 웃으며 분유통을 건네주셨다. 그 따뜻한 미소가 내 기억 속 아빠의 마지막 모습이다. 사람들은 큰 이별 앞에 큰 징조가 있을 거라 믿지만, 진짜 이별은 언제나 예고 없이, 너무나도 평범한 하루에 불쑥 찾아온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말이다. 그날 이후 내 삶의 시계는 한동안 멈추었다. 익숙했던 풍경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러키, 마음을 바꾸는 순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얼마 전 유해진 배우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 ‘럭키’를 다시 보게 되었다. 영화 속 주인공 형욱은 냉혹한 킬러였지만, 목욕탕에서 비누를 밟고 넘어져 기억을 잃고, 무명 배우 재성의 삶을 살게 된다. 돈도 없고 기술도 없는 최악의 환경에 떨어졌지만, 형욱은 좌절하는 대신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찾아나간다. 칼을 다루던 솜씨로 김밥집에서 화려한 대추 꽃을 피우고, 엉망인 옥탑방을 깔끔하게 정리하며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영화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된 이유가 있다.
형욱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건, 처한 환경이 갑자기 좋아져서가 아니었다. 지금 내 눈앞에 놓인 삶을 대하는 ‘마음’을 바꾸었기 때문에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 삶도 마찬가지였다. 커다란 상실감에 세상을 원망하며 주저앉아 있을 수도 있었지만, 결국 중요한 건 내 마음가짐이었다.
주변 상황이 나를 넘쳐서게 한 게 아니라, 내가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언제든 제2의 삶을 살 수 있다는 큰 깨달음 준 것 같다.
아빠 생신 이틀 전, 마지막 저녁
“아빠 생일 축하해, 분유통 던져줘 — 그게 마지막 대화였다.”시간을 조금만 앞으로 돌려본다.
아빠의 생신을 이틀 앞둔 날 저녁이었다. 온 가족이 오랜만에 모여 저녁 식사를 했다. 엄마가 정성스레 차린 찌개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했고, 아빠는 오랜만에 자식들과 손주를 보며 웃으셨다.
“아빠, 이번 생일에는 내가 진짜 맛있는 거 사줄 테니까 기대해!”
“허허, 네가 주는 거면 물 한 잔도 맛있다.”서로 웃고 떠들며 보낸 그 행복했던 저녁 식사가 끝나고,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핸드폰 벨소리가 울려 받았는데, 들려온 목소리는 청천벽력 같았다. 아빠에게 급한 일이 생겼다는 연락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 눈앞에서 건강하게 웃으시던 아빠가 하루아침에 사고가 나셨다고, 병원에 급히 오라는 소식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다.
그렇게 영화처럼 야속하게도, 우리의 마지막 저녁 식사는 순식간에 과거의 추억 속으로 넘어가 버렸다.
63세, 16년 전 — 한창 일할 때 떠나셨다
그때 아빠의 연세는 고작 63세였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젊고 아까운 나이, 지금으로부터 벌써 16년 전의 일이다. 아빠는 직장에서 한참 능력을 인정받고 열정적으로 일하실 때였다. 매일 아침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구두끈을 매시던 아빠의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아빠, 오늘도 늦게 와?”“우리 딸 맛있는 거 사주려면 열심히 일해야지, 금방 올게!”그렇게 일과 가족밖에 모르던 분이셨는데, 인생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그 나이에 갑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나셨다.
한창 일할 나이에 허망하게 가버리신 아빠를 보며 세상이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중3, 집 마당에서 배운 테니스
아빠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기억이 하나 있다. 내가 중학교 3학년이던 시절, 우리 집 마당에서 아빠에게 테니스를 배우던 기억이다. 당시 아빠는 직장 테니스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실력자이셨다. 동료들이 아빠의 경기 모습을 보며 “자세가 정말 예술이다”라며 칭찬하시던 기억이 난다. 어느 날 내가 “아빠, 나도 테니스 치고 싶어!”라고 조르자, 아빠는 그 길로 마당 구석 벽에 비싼 장비를 사는 대신, 직접 주머니에 흙을 가득 채워 묵직하게 만들고는 거기에 튼튼한 줄을 길게 매달아 고정해 주셨다. 공이 날아갔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만든 아빠표 특제 연습기였다.
“자, 테니스는 힘으로 치는 게 아니야. 자세가 예뻐야 공도 예쁘게 가는 법이다. 똑바로 서서 라켓을 끝까지 밀어봐.”“이렇게? 아빠, 나 잘하지?”“오, 그렇지! 우리 딸 소질 있네!”마당 벽을 가득 채우던 탁, 탁 공 튀기는 소리와 아빠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꿈이 군인이었는데, 여자가 군인이 뭐야
사실 내 어릴 적 진짜 꿈은 멋진 군인이 되는 것이었다. 제복을 입고 나라를 지키는 당당한 내 모습을 매일같이 상상하곤 했다.
하지만 내 꿈을 들은 아빠의 반응. “아빠, 나 나중에 크면 꼭 직업 군인 될 거야!”“여자가 군인이 뭐야. 험하고 힘든 길을 왜 가려고 해. 절대 안 된다.”당시에는 아빠의 그 고리타분한 반대가 야속하기만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집안 형편이 급격하게 눈에 띄게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가세가 기울어지면서 내 꿈을 고집할 여유가 없었다.. “엄마, 나 그냥 대학 포기하고 빨리 취직할래. 돈 벌어서 집안에 보탬이 돼야지.”“미안하다, 딸...”결국 나는 오랜 꿈 포기하고, 가족들을 위해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길을 택해야 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해야 했던 현실의 무게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그래도 지금, 사업 아이템 찾는 중
인생이란 참 묘하다. 영화 ‘럭키’에서 형욱이 기억을 찾은 후 다시 킬러의 세계로 돌아갈지, 아니면 자신을 진심으로 채워주었던 배우의 삶을 살지 고민하다 결국 새로운 인생을 선택했던 것처럼, 나 또한 과거의 꿈에만 얽매여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빠가 일찍 떠나신 것도, 내 꿈을 접고 치열하게 살아야 했던 것도 모두 내가 지나온 삶의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다.
비록 군인의 꿈은 이루지 못했고. 아빠는 더 이상 내 곁에 계시지 않지만, 나는 지금 또 다른 도전을 시작하려 한다.
지나온 삶 속에서 다져진 굳은살을 무기 삼아, 나만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중이다. 요즘 내 머릿속은 온통 새로운 아이디어로 가득 차 있다. 시장의 흐름을 분석하고, 사람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공부하고 있다. 내 안에는 중3 시절 마당에서 흙주머니를 치며 다졌던 끈기와 형욱의 유연함이 흐르고 있다고 믿는다. 지금은 사업 아이템 찾는 중, 꼭 하려고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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